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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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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218.♡.192.227) 작성일17-04-15 16:33 조회1,9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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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에 일어나 근무교대를 위해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창문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거세고 진눈깨비까지 내린다.

“우르릉 꽝” 파도소리가 심란하다.

정말 나가기 싫다. 하지만 그바람과 진눈깨비속에서 간절히 교대시간을 기다리는 동료가 있다.

 

침상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취사병에게 눈길이 절로 간다.

취사병은 초소내의 선임병이 보통 맡는데 유일하게 야간근무를 서지 않는 보직이다.

 

라면 끓이는 것 외에 할줄아는 음식이 없었던 내가 엉뚱하게 후임 취사병을 하겠다고 하자 선임하사가 떨떠름한 표정이다.

 

부대원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겠다는 사명감은 애당초 없었고, 조리 실력 또한 알만한 사람은 다안다.

 

오로지 밤에 긴잠을 자겠다는 것이 내가 취사병을 하고자 하는 이유이니 선임하사의 얼굴이 좋을 리가 없다.

 

짬밥이란게 매뉴얼대로 하면 누가 해도 똑같은 것이라며 선임하사를 설득하여 결국 승낙을 받아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20여명의 아침을 준비해야 하였지만 추운 바깥에서 근무를 서는 것에 비기랴, 더군다나 라디오도 들으며 일을 하니 힘든줄도 모르겠다.

 

그고요한 새벽에 최진희의 물보라를 들으며 아침을 준비하던 그때가 지금도 아련하다.

 

취사병 취임 2틀후 폭설로 길이 끊기는 바람에 상급부대에서 김치를 공급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식 3찬중 가장 중요한 김치를 빼고 배식을 할수 없는 노릇이어서 김치를 담가야만 했다.

 

어렴풋이 김치를 담는 것은 보았지만 사실 그때 나는 김치 담는 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명색이 취사병인데 누구에게 물어볼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선 배추를 깨끗이 씻고 칼로 김치모양을 만들어 큰대야에 넣고 소금과 고춧가루등 양념을 넣고 버무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참을 버무려도 김치가 날아갈려고 한다. 몇 개 주어먹어 보았는데 풀냄새가 난다.

 

지금이야 배추를 소금에 절인후 김치를 담는 것을 알고있지만 그때는 소금과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리면 김치가 되는줄 알았다.

 

어찌되었건 날아갈려고 하는 김치나마 배식을 하지않을수가 없었는데, 돌아온 식판을 보니 김치에는 손도대지 않았다.

 

점심 밥상에도 김치를 올려야 하는데, 아침에 손도대지않은 김치를 올릴수는 없었다.

 

이제와서 취사병을 그만 두겠다고 할 수는 없고 참으로 난감하였다.

 

궁하면 통한다는 옛말이 어쩌면 그리 맞는지,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날아갈려는 김치를 몽땅 쓸어붙고 고춧가루를 조금 더넣고 끓이면 김치찌개가 되겠다 싶었다.

 

솥과 솥뚜껑 사이로 새어나오는 김은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런데 냄새가 조금 이상하다.

“........”

솥을 열어보니 죽이 되어있다.

 

배식판에 놓인 김치찌개를 들여다보는 부대원들의 묘한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오글거린다.

 

아침에 이어 점심에도 김치와 관련된 반찬에 젓가락질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이은 선임하사의 호출, 선임하사가 묻는다.

 

“진병장, 니 취사병되고 식당분위가 오째 바뀐지 아나?”

“???”

“식당이 억수로 조용해진거 모르겠더나?” 선임하사는 경상도 사람이다.

무슨말인지 몰라 의아하게 바라보자,

“전부 니쫄병들이니 오짜겠노...

“!!!”

‘그랬던 것이구나 엉망진창 밥상을 받으면서도 고참이라 말도 못하고.. 어쩐지 식당이 조용해졌더라니..’

 

이틀 두끼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취사병을 그만두게 되었다.

 

안락한 잠자리는 이틀밤의 꿈이었고, 또다시 나는 밤마다 고통의 바다를 바라보아야 했고, 그견딜 수 없는 소음, 파도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 잔인한 젊은날의 초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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