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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출사표/후기

내게로 달리는 길(동아마라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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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221.♡.152.103) 작성일17-04-07 10:02 조회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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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화로였다. 증기기관차의 화로. 벌건 석탄의 열기를 동력으로만 변환시키고야 말겠다는 뜨거움이 충만한 자리였다. 계량 못할 에너지의 일렁임에 경외스럽기까지 한 공간.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출발선 뒷자리는 그렇게 이글이글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왜 여기 서 있는 걸까?’
마흔 중반을 맞으면서 불혹의 계절을 심하게도 타던 나였다. 청년 시절 품었던 푸릇한 꿈의 이상은 현실의 담장에 걸려 적당히 퇴색되었고 턱없이 작아져버린 지금의 그릇에 조급한 마음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윤택한 자아를 꿈꾸었건만 식어버린 삶의 열정 그리고 방향마저 희미한 일상의 편린들, 이처럼 삶의 지렛대가 필요한 시점에서 나는 마라톤을 만났다.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인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로운 추진력을 얻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달려야 한다! 나는 떠나야 한다! 결승선 저 끝에 있는 참된 나를 찾으러 순례자처럼 동그란 회귀의 여행을 떠나는 거야.'
‘5, 4, 3, 2, 1, 출발!’
폭죽이 터지고 와--- 함성소리와 함께 출발선은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듯 사람들을 거리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구마구 길 위에 흩뿌려지는 사람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리며 엄숙하게 휘몰아치고, 그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순간! ‘흐흑~’ 하며 안쪽에서 번져오는 서글픈 습기가 있었다. 내동댕이치듯 던져진 자신에 대한 고독한 서러움이었을까. 달려야할 거리가 상징하는 짐에 대한 엄중한 중량감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사연에 침묵하며 같은 방향으로 내닫는 전우들의 행진에 감격이라도 했던 것일까. 저마다 사유의 등짐을 지고 우리, 혹은 나는 고난의 여정을 스스로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나는 달려야 한다. 홀로의 인생 그 명징한 실체를 찾으러 달리는 것이다.

남대문을 돌아설 즈음 어느 건물 위의 대형화면에 마라톤 행렬이 중계방송 되고 있었다. 화면 속으로 빨려들 듯, 화면에서 뛰쳐나온 듯 달림이들의 물결은 꾸역꾸역 위대한 행렬을 만들었다. 용트림 하듯 종각과 동대문을 감싼 힘찬 호흡들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당당한 흔적을 도로에 찍었다. 발자국이 질문 하면 숨소리가 대답하고, 질문 속에 답이 있고 대답은 또 다음 질문을 낳고... 그 꼬리를 붙들며 달렸다.
그러다 보니 5킬로-25분 16초, 10킬로-50분 20초. 내겐 너무 빠른 페이스였다. 오바페이스! 내 실력 상 5분 30초 페이스로 달려야 하는데 풀코스 경험이 적어서인지 주변 흐름에 덩달아 5분 페이스로 뛰고 있었다. 어쩐지 뒤쪽에 3시간 30분 페이스메이커가 아까부터 쫓아오고, 우리 클럽 고수들과 나란히 뛴다 했더니...앞으로 다가올 후반부 구간의 고행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고행은 이미 바지주머니에서부터 야금야금 시작되고 있었으니. 아랫도리에 묵직하게 매달려 오던 그것, 그것은 바로 미처 떨쳐내지 못 하고 온 휴대 전화기였다. 지급받은 기념품이 너무 커서 교환하러 간 사이 날 태우고 온 클럽의 차량이 잠실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하는 수없이 전화기를 휴대하고 달리던 참이었는데 뜻밖의 복병이 될 줄이야. 툭툭치는 유쾌하지 않은 접촉감, 갈수록 가중되는 중량감은 달리는 지금의 큰 훼방꾼이었다. 게다가 그날따라 자주 울리던 전화기 벨소리!
그런데, 나는 응답도 할 수 없는 신호음을 하나씩 타넘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하 이거로구나. 몸으로 실천하는 정신의 가벼운 충만! 세상과의 내통을 잠시 단절했을 뿐인데 이토록 홀로여서 가득하다니! 내 것 인양 쥐고 살아 온 것들이 어찌 이리도 태산이었을까 싶어 나는 떨치고 또 떨치며 달렸다.

올림픽 공원을 지날 때쯤이었을까. 해가 내리쬐고 기온이 올라가면서 땀이 비 오듯 했다. 배출되는 땀과 함께 삶의 찌꺼기도 빠져나오는 흐뭇한 상상을 한다. ‘허상들, 거짓들....’ 배설에의 후련한 쾌감과 함께 깊어지는 발걸음, 그렇구나. 오래 달린다는 것은 거리가 길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지는 것이구나. 출발선에서 멀어질수록 자아를 향해 가까워진 것이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깊어지는 것이구나, 많이....

송파역을 지나 가락시장 부근을 지날 즈음 몸이 신호를 보내왔다. ‘힘들지, 걸어가, 주저앉아’ 납 신발을 신은 듯한 발걸음, 허벅지에 시루떡 몇 겹을 얹어놓은 듯한 이물감, 이른바 마의 35킬로 구간이었다. 탄천을 지나는 작은 다리언덕도 버거웠다. 저 멀리 종합운동장이 보이는데 반갑기도 했지만 내가 닿을 수 없는 마법의 성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내가 다리를 끌고 가는지 다리가 나를 짊어지고 가는 건지 구분도 안 될 지경이었다. 2+2=4, 4+2=??? 더 이상의 계산도 혼미해졌다. 스펀지를 잡긴 잡았는데 닦을 수가 없다. 옆의 38킬로란 숫자에도 맘이 짓눌렸다.

뒤죽박죽의 머릿속에서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하던 지난겨울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낮이고 밤이고 안양천변을 얼마나 달렸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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